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에는 동기주의와 결과주의라는 두 관점이 있다. 동기주의는 외부적 행위를 일으키는 내면적 동기를 윤리적 판단의 기준으로 수용하는 관점이며, 결과주의는 행위로 나타난 결과를 윤리적 판단의 기준으로 수용하는 관점이다. 역사적으로 동기주의는 칸트의 의무론을 통하여 개인윤리의 기초가 되었고 결과주의는 공리주의를 통하여 민주주의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칸트의 의무론에 따르면 행위가 도덕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외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의지로부터 유발된 것이어야 한다. 도덕적인 행위는 행위의 도덕성 자체가 목적이며 행위의 결과에 의존하지 않는다. 인간은 양심에 비유되는 ‘정언명령’이라는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하기에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 따라서 선한 의지라는 동기에 따른 행동은 결과와 무관하여 선하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행위의 결과가 무시되고 행위의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한편 결과주의는 행위의 동기보다 결과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선한 의도로 행한 행위가 바람직한 결과로 나타나든지 나쁜 결과를 초래하든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 공리주의에서처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결과주의 윤리에서는 수단과 목적의 연속적 관계를 거부하거나 목적이 수단에 비해 우월하다고 보았지만, 동기주의의 관점에서는 수단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올바른 목적이 있다는 생각은 불합리하며, 목적의 정당성은 행위의 수단과 과정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목적의 타당성은 수단의 연속성에 있으며 수단을 통해서만 구체화한다. 수단이 얼마나 적절하게 선택되었는가는 목적이 얼마나 수단을 통해 실현되었는가에 달려 있다. 하지만 내적인 동기와 외적인 행위가 일치하지 않으면 위선에 빠진다. 허영심에 기인한 자선 행위에서처럼 악한 동기가 선한 결과를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동기주의와 결과주의의 한계를 통하여 수단과 목적의 분리가 개인의 행동이나 제도와 정책에 있어서 독단주의에 빠지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다.
경제학에서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자유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본이라는 수단이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의 자유는 자본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정치적 영역에서도 무질서의 확산을 방지하는 법의 목표가 그 목표를 실현하는 수단과 과정에 있어서 또 다른 무질서를 일으키고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는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도 목표가 다른 집단의 구성원이면 적이 될 수 있고,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도 동일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연대하면 선한 존재로 인정되기에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수단과 목적 사이의 도덕적 판단이 무너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정의는 사회가 지향하는 목적이며 법은 그것을 가리키는 이정표이다. 경제영역에서 자본이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수단인 것처럼, 정치 질서에서 법은 정의라는 목표를 실현하는 수단의 기능을 유지해야 한다.
목적은 추구하며 도달해야 하는 목표이고 수단은 그곳으로 가는 절차와 방법이다. 수단과 목적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수단이 불가능하면 목적을 이룰 수 없고 실현할 수 없는 목적에는 어떠한 수단도 무의미하다. 목적 없는 수단은 무의미하며 수단 없는 목적은 비현실적이다. 환자의 생명권을 존중하기 위한 존엄사나 말기 암 환자에게 긍정적 위로를 하는 의사의 ‘하얀 거짓말(white lie)’에서처럼 수단과 목적은 각각의 한계를 인정하고 상황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