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같이多가치
제2부 담장 너머, 더 큰 공동체 세상으로 : 세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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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담장 너머, 더 큰 공동체 세상으로 : 세션 1
한준상 (재단이사, 연세대 명예교수, 한국배움학회장)
커뮤니티 즉 ‘공동체’라는 말은 본래 우리의 언어와는 그리 친숙한 단어가 아니다. 원래 공동체는 서양의 ‘커뮤니티’라는 말을 한자로 표현한 것인데,우리의 경우는 보통 ‘마을’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다. 우리 말에서 ‘작은 마을, 큰 마을’이라는 같은 단어로 친숙하게 써 왔다. ‘커뮤니티’라는 말 자체가 학문적으로 사용된 것은 1900년도경 부터이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퇴니스가 게마인 사프트라는 말을 쓰기 시작해서, 공동체라는말은 사회학적으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이때 게마인샤프트는 혈연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혈연사회, 씨족중심의 일차적인 공동체사회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게마인 샤프트의 확장, 변형된 개념으로서 ‘이익 공동체’를 표현하는 단어로 게젤샤프트를 제안하기도 했다. 커뮤니티, community를 사회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우리도 중국이나 일본 학계에서 활용하던 단어인 ‘공동체(共同體)라는 한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학문적인 용어로 활용하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동체는 보통, 비슷한 관심사, ‘동일한 관심사를 가진 동일한 집단’을 의미한다. 믿음, 자원, 기호, 필요, 위험 등의 여러 요소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참여자의 동질성과 결속성에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를 지니는 일차적인 집단을 말한다. 공동체를 뜻하는 커뮤니티(community)라는 말 자체는 그 옛날 라틴 제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처음에는 커뮤니스(communis)로 표현했다. 코뮤니스는, 같이, 모두에게 공유되는 것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커뮤니스Communis 라는 말은 라틴어 접두사 con/ com- (함께)와 munis (서로 봉사한다는 의미와 관계 있다는 의미)의 합성어이다.
이러한 의미의 커뮤니티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진화되며 우리에게 친숙하게 일반화 된 것은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의 일이다.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커뮤니티라는 말에는 두가지 핵심적인 의미가 더 강조되게 되었다. 첫째로 관계라는 뜻이 중요하게 개입되었다. 관계라고 번역되는 릴레이션(relationship)이라는 말에는 우정과 소속, 친교 등을 상징하는 관계성의 의미가 중요하게 담겨 있다. 둘째로, 특별히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커뮤니티라는 단어에는 생존으로서의 ‘빵’, 나눔으로서의 빵과 생존의 의미가 부가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했다. 커뮤니티라는 말에 먹는 ‘빵’, ‘식량’, 나눔이라는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공동체의 의미가 사회학적으로 지역사회의 기능이 부각되었다.
시민들에게 간절했던 ‘빵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강조된 공동체라는 개념은 여러 시대를 거쳐오면서, 공동체의 의미가 시대별로 조금씩 변해오기는 했어도, ‘공동체’라는 말에는 태생적으로 ‘서로 함께 속함과 서로 가까이 지낸다는 친교의 의미’와 무엇인가 ‘더불어 함께 일한다’는 의미, 그리고 ‘빵을 함께 나눈다’, 그러니까 생존을 위해 소속원 서로가 공생공락하는 마을이라는 뜻은 그대로 남아있다.
공동체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시작되고, 프랑스어에서 제대로 부화된 개념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3 가지의 중요한 ‘관계의 의미’를 지닌다. 첫째로, 중세시대는 하나의 신(神)이 세상을 지배했던 시대였기에, 그 당시만 해도 공동체에서, ‘신(神)과 인간(人間)’이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관한 신과의 관계 설정의 문이고, 둘째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과 사람’들이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으로 일상적인 삶과 생활에 동력을 주는 물질과 인간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공동체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동체에서 신(神), 인간(人間), 삶과 생활이라는 것은 ‘빵과 생활’이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다. 이 신과의 관계, 사람들간의 관계, 그리고 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생존을 위한 삶의 투쟁간의 관계와 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공동체와 갈등의 양상 또한 다양하게 바뀌게 되고 서로 다르게 진화되게 된다. 이들 삼자간 관계의 조합 양상과 변화에 따라 공동체라는 말도 다양한 렌즈를 통해 각기 다른 만화경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고 변화하게 된다. 그저 편하게 공동체살이, 세상살이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하나의 만화경같은 조화로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만화경은 아름다움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갈등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모습의 연속일 수도 있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 각자는 각자 모두가 공동체라는 만화경이나 요지경의 부속품이거나 요소들이다. 지역사회 혹은 공동체, 커뮤니티란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삶을 위해서 어떠한 인생작품을 만들어 내는 장소의 의미 즉 인생공방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공방(工房), 흔히 작업장이라고 칭해지는 ‘공방’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워크숍(workshop)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거나 물건을 만들거나, 미술작품을 만들어거나, 도자기를 만들거나 노래를 배운다든가 그럴 때, 그런 작업을 해내는 장소를 보통 ‘워크숍’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워크샵은 우리 말로 ‘공방’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보다 더 의미있게 표현하기 위해, 드러내기 위해 ‘무엇인가를 자기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 낸다.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호는 타인들과 더불어 즐기기 위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곳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공방, 웍샾workshop이라고 부른다. 자기자신이라는 삶을 만들어가는 직업장이 바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이기에, 공동체는 각자에게는 하나의 ‘인생 공방’인 셈이다. 커뮤니티는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되기에, 공동체라는 인생공방은 각자에게 어느 하나로 고정되어있거나, 정해져 있는 외로운 장(場)은 아니다. 인생공방으로서의 공동체, 커뮤니티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내는 각자들에게 매 시간 매 순간 복잡다단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각기 다른 각자적 삶의 욕구들이 서로 자아내는 씨줄 날줄의 직조물 같은 역동체의 성격과 모습을 지닌다.
각기 다른 사람들의, 각기 다른 욕구에 따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그려지는 ‘만듦의 장’이기에 커뮤니티는 결코 ‘굳어 있는 장’이 아니다. 공동체라는 인생의 공방은 굳어 있는 하나의 명사(名詞, noun)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움직이어야만 한다. 구성원들 각자가 자기의 모습이 들어나는 동사로서의 의미 작용을 발산하는 살아있는 작업장이어야 한다. 커뮤니티 내에서 각자가, 각 개인나름대로 어떤 작품을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각자의 삶은 이전과는 새롭게 달라진다.
공동체라는 인생공방에서 각 구성원들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한 올 한 올, 한 땀 한 땀’ 쌓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삶의 의미를 직조하며 그 삶을 입고 다니게 된다. 마치 옷을 직조할 때 가로세로, 씨줄 날줄을 모아 하나의 옷감과 옷을 완성해 가는 ‘길쌈’의 과정처럼, 그렇게 자신의 삶을 공동체 속에서 한 올 한 올 쌓아가는 일,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곳이 바로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각자의 모습을 표현해내는 전시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동체는 구성원 각각에게 인생의 공방, Life workshop, 라이프 웍샾이 된다.
커뮤니티에서 살아가기 위해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각자의 삶을 나름대로 각자 인생공방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 인생공방에서 각자는 모두 하나의 예술가가 될 수 밖에 없다. 작가의 지명도나 작품의 유명도는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작품의 완성도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각자는 자기의 삶이라는 작품을 제대로 끝내야 할 일정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거나, 각자는 공동체라는 인생의 공방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작품에 혼을 실어 완성해내면 되는 일이다. 이 만화경 같은 일상의 삶속에서 각자가 얼마만큼 위대한 예술가가 되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제기 일 뿐이다.
각자, 그 누구든, 어떻게 태어났던, 출신배경의 높낮이에 무관하게 나름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예술가로 기능해야 한다. 이 사회가, 인생의 공방으로서의 공동체가 각자에게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순간이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인생작품을 잘 만들어가도록 허용해 주고,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각자는 나름대로, 자기자신이라는 대리석에 자기자신이라는 작품을 조각해내야 한다. 그 작품을, 나름대로, 대비드, 비너스와 같은 명명을 하는 일은 또 다른 일이다. 그저 나는 나라는 인생작품을 조각해 내면 되는 일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방편이, 나라는 인생작품을 조각하거나, 칠하거나, 작곡해내는 해내는 방편이 바로 ‘배움’이다. 각자는 공동체라는 인생공방에서 배움이라는 방편으로 자신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들이다. 배움의 역사를 살펴보면, 배움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문명과 의식에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에게 친수한 배움이라는 말은 서양, 특히 라틴세계에서는 에루디션(Erudition)이라고 불러왔다. 배움이라는 개념은, 교육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학습 즉 러닝(learning)과는 그 뜻이 다르다. 우리의 경우, 문명사적으로 배움이라는 말은 ‘배다’에서 나온 것이다. 배움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모든 동물에게 공통된 것, 아이를 배다, 새끼를 배다, 만들어 내다, 창조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동시에 버릇이나 습관이 배다, 흰 옷감에 검정 물감이 배다 처럼, 무엇인가 하나의 버릇처럼 스며든다는 의미도 있다. 마지막으로, 학자들간에 합의가 완전히 되어 있지는 않으나, 배우다라는 말에는 밝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훤하게 밝히다, 모르던 것을 알다,탐구하다 라는 뜻을 담고 있다.우리 문명사에서, 단군조선의 민족을 ‘배달’민족이라고 부르는데, 배달이라는 말도 본래 ‘밝(히)다’는 의미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학문적인 논쟁은 뒤로 하더라도, 일단 배다라는 말에는 ‘탐구하다, 밝히다, 비추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어쩌거나, 배움이라는 말에는 모르는 것을 안다, 밝히다 라는 의미로서의 학습심리학에서 말하는 학습의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길들이다, 즉, 버릇, 습관을 얻다, 제대로 된 습관을 길들이다라는 뜻과 무엇인가 새롭게 만들어 내다, 창조한다’는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만들어 낸다’는 의미를 지니는 배움은 인생공방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되는데, 공동체에서 일상의 배움을 완성해 나가는 사람을, 자신이라는 작품을 만들어가는 사람을 일러 ‘호모 에루디티오’라 표현한다.
원래 에루디션(Erudition)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배우고 가르친다는 행위 모두를 의미한다. 로마인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에루디티오’를 지식(Knowledge)이나, 지혜(Wisdom)를 익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썼었다. 또는 알차게 배우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도 썻다. 그래서 이 당시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106~43 B.C.) 같은 사상가는 로마인들이 에루디티오가 되어야 로마의 문명이 영원해질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스스로 익히기를 좋아하고 서로 배우며, 서로 가르치며, 서로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배움이나, 토론, 공동체에로의 참여와 혹은 향연을 지칭할 적에도 이 에루디티오라는 단어로 대신했다.
호모 에루디티오는 학습의지(the will to learn)와 학이시습(學而時習)을 실현하려고 배움에 의지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특징적으로 더 드러내 보이고 있는 최대의 장점은 삶의 질이며 행복의 추구감이다. 인간의 행복추구 노력은 본능이다. 학습하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으로 내재되어 있다. 인간은 행복추구를 통해 인간됨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바로 이 행복에의 추구가 인간됨의 고상한 목적이기도 하다. 고상함을 이루려는 인간됨의 목적은 일상 생활의 학습으로부터 실천된다.
호모 에루디티오는 자기 주도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관리하는 능력을 습득하기 위해 스스로 익히는 사람이다. 둘째로 행복은 사려 깊음에 의해, 다시 말하면 생각하기의 반추와 반성을 여과하는 과정을 거쳐야 제멋이 난다. 호모 에루디티오는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존재로 생각의 여과기를 통과하기를 즐긴다. 이런 모든 일은 인간의 의식에 의해 행해진다. 의식 있는 생각 속에서 사려 깊음이 더해지고, 인간의 지혜는 또다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성장시킨다. 셋째로 행복은 성찰적 과정을 수반해야 제격이다. 성찰적임은 스스로 자신의 행복추구 행위에 대해 반추해 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함이다. 자신의 행위와 생각을 사려 깊게 반추하는 호모 에루디티오는 자기 주도적 비판적 사고능력을 갖고 있다. 결국 이런 요소들이 행복을 구성하기에 호모 에루디티오는 배움을 통해 행복의 요건을 본능적으로 충족시키는 인간의 본성이다. 배움과 가르침을 새롭게 복원해 낸 이러한 행복은 인생공방, life worshop실천 현장에서 얻어내야 될 성취물이기도 하다.
배움의 존재, 호모에루디티오는 자기를 매일 같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존재를 의미한다. 매일 같이 힐링하며 치유해 나가는 존재로서의 호모 에루디티오의 특징은 배움을 즐기는 사람이다. 몸과 마음이 튼튼한 자기 치유적 존재이다. 호모 에루디티오는 의식소통을 해 나가는 사람이다. 소통은 커뮤니케이션인데, 선물을 나누는 사람을 의미한다. 소통은 말의 소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의식의 소통이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이해하며 소통하는 ‘의식의 소통’이 중요하다.
호모에르디티오는 지식사회학적 관점으로 사회를 이해하려는 사람이다. 지식사회적 관점으로 진리의 규명을 위해 의심하고, 생각하며 점검하고 보는 사람이다. 책을 읽을때 단순히 문자를 보지않고, 문자안에 숨어 있는 문명사적인 의미, 뜻, 의심을 통해 참 진리, 진짜 참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존재이다. 호모 에르디티오는 배우는 사람, 늘 자기의 삶을 워크샵 하는 사람을 말한다. 힐링을 전파, 전염하는 사람으로 더불어 쾌유, 힐링하는 사람이다. 커뮤니티라는 삶의 공방, 인생의 공방, 라이프 웍샾에서 모든 구성원이 ’배움‘을 즐기게 하는 사람들이다.
학습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강조는 동양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학습하는 인간에 대한 예찬이 동양 사상의 핵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더 타당하다. 공자(孔子, 551~479 B.C.)가 그의 삼천제자들에게 가르친 첫 번째 사상이 바로 학이시습(學而時習)의 인간상이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해석되는 배우며 익히는 인간의 지표인 학이시습은 동양 사상의 학습 정신이다. 공자가 그의 제자들이 삶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거울로 삼도록 남긴 말인 학이시습은 학습하는 인간의 자기주도학습 능력, 일상 생활 속의 경험에 의한 지혜, 이런 것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학이시습이라는 글자 중에서, 학(學)이라는 글자는 학습하는 인간의 의미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따라서 익힌다는 의미로서의 ‘학’(學)은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통괄하는 세계로서 학습자가 꿈꾸는 이상의 세계, 나의 세게에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생성과 소멸을 거치면서, 궁극적인 자신 내면의 세게에 씨앗을 제공하는 것이 배움이다. 시(時)라는 글자는 시의적절한 배움의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 인간이 자신의 요구에 의해 필요한 때에는 언제든 학습이 일어남을 의미한다.
습(習)이라는 글자는 새의 날개짓과 일백 번이라는 두 글자가 합하여 성립된 문자이다. 습은 인간이 학습하는 행위가 배우는 이 나름대로의 새로운 해석과 응용, 그리고 활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전달된 지식을 단순하게 전수받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반추하며, 새롭게 쓰임새를 높이는 이른바 앞으로 필자가 논의하게 될 개조주의학습의 속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학습을 할 때 마치 새가 날개짓을 하기 위해 수백 번씩 날개를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나는 방법을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습득하듯, 학습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학습은 배우는 인간의 두 가지 동양적인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하나는 공부론(工夫論)적으로 학습하는 인간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론(修行論)적으로 학습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학습하는 인간의 총체적인 모습이다. 김지하 시인이 이야기했듯이, 배운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은 지식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고 내면화시켜 삶의 자연스런 태도를 발현하는 자발적인 노력이다. 인간 내면의 행동이나 느낌은 다르지 않은 채, 오로지 지적 습득이나 지식 이해를 위해서 앞서 나가는 것은 공부는 사람 스스로를 불균형하게 만든다. 공부와 비슷하게, 수행이란 ‘없는 것’에서 무엇을 ‘만들어 내거나 얻어 내는’노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 ‘잘못 만들어지거나 불필요한 것’을 ‘닦아 내는’ 자정 노력으로서의 인간성 회복을 추구하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인간의 생명은 얻은 후에는 반드시 버리고 비우기 때문에 자기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 역시 공부와 수행의 연속된 버리고 비우는 행위를 지속하기에 그 학습이 생명력을 갖게 된다.
공자와 같은 성현들은 자아 실현을 위해 익히며 배우는 인간의 참된 도리와 모습을 제자들에게 인간됨의 도리로 가르친 것이다. 결국 동서양의 학습론은 학습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인정으로 인해 학습의 이질성들이 새롭게 하나로 ‘하이브리드’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동양의 학이시습(學而時習)과 서양의 호모 에루디티오는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고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를 엇지르는 하이브리디제이션의 새로운 교육학으로서 네오 앤드라고지의 출생을 가능케 만드는 문명적인 모태가 되기에 충분하다.
배우는 동물인 호모 에루디티오가 살아가는 이 한 세기의 시대를 우리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라고 부른다.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새로운 용어는 1960년대 이후 세계가 획일적이고 경직된 권위와 관습, 문화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대안을 찾지 못한 가운데 등장했다. 모더니즘의 ‘진보성’의 허울에 대항한 새로운 움직임으로 탄생한 문화가 포스트모더니티이다. 모든 문화는 해체와 재조직을 거치는 과정에서 새로운 창조 능력이 주어진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과 이로 인한 의구심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런 요소는 하나의 문화가 자율적으로 저해 요소를 흡수하여 의미 있는 경험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한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문화 창조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위기와 도전을 부추기는 파격성과 문화적 일탈을 필요로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문화적 형태의 출현은 바로 파격성을 전적으로 지원해 주는 시스템이며, 파격 문화에 창조적 에너지를 제공하는 사회적 조건이며, 문화적 조건이다.
세계화는 인간 생활에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바꾸고 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초월성은 세계이웃을 창출했다. 세계 시민이 포스트모던의 소비자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비는 더이상 재화나 용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미지, 감각, 상호간의 차별성까지도 소비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의 문화는 그 무엇과도, 그 누구와도 차별화되는 문화 주체를 생산해 내게 된다. 포스트모던 사회 특징 중의 하나인 정보 사회는 소비자로서의 역할만이 주어졌던 사람들에게 문화의 생산자가 되도록 문화적 자본을 개방했다. 뉴미디어는 문화의 생산 및 향유의 과정에서 문화 수요자들에게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했다. 매체와 수요자 사이에 상호 작용이 강화되면서 문화 생산 과정에 수요자의 취향 역시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그 결과 문화의 수용자가 스스로 문화를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더 확대되었다.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은 이제 무의미하다.
개인은 자신의 문화의 생산자임과 동시에 소비자이다. 앨빈 토플러는 이것을 프로슈머(Prosumer=producer+consumer)라고 불렀다. 생비자(생산자+소비자)인 아들 프로슈머들은 이제 그 어디서든지 살아 있는 학습 경험을 창출해 내고 있다. 음악 연주나 작곡 소프트웨어,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가 개발됨으로써, 지금까지 문화의 수요자였던 사람들이 문화의 창조자로 변신하고 있다. 그런 매체를 이용하여 개인적 창작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더욱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다양한 비디오 클럽이나 대중 음악에 사용되는 샘플러들이 관련분야에 별다른 전문적 지식 없이도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원하는 문화를 생산할 수 있도록 돕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문화간의 장르가 허물어지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음악과 영화 광고가 결합된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과 컴퓨터그래픽의 결합, 컴퓨터와 텔레비전의 융합 현상이 그것이다. 그 결과 문화의 소비가 더욱 다양하고 용이해질 뿐만 아니라, 문화의 내용도 훨씬 풍부해지게 된다.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 사이의 경계도 소멸된다. 재즈와 시인의 만남, 대중 음악과 클래식 음악이 결합하는 크로스오버 현상은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 바로 그것이다. 포스트모던 특성 그대로 문화적 소비는 ‘나’의 창조자이며 나의 자아 정체성이다. 나만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창조주는 바로 나임과 동시에, 내가 나의 문화의 소비자가 되는, 그래서 나의 문화가 나를 말하는 이미지 자체가 포스트모던의 시작이다.
모던 사회는 산업 사회로 일컬어진다. 자본의 소유, 혹은 생산수단의 소유가 바로 권력과 부의 획득 수단으로 여겨지는 사회가 모던 사회이다. 산업 사회에서의 자본과 생산수단은 인간에 의해 지배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세상의 조건이 달라졌다. 인간만큼은 통제될 수 없는 생산자이다. 인간의 지식은 생산수단 중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시대를 우리는 포스트모던 사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식이나 관념도 마치 공산품처럼 시장에서 사고 팔 수 있는 교환품이 되고 있다. 이런 요구는 새로운 학습 사회의 출현을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가치 있는 지적 자본으로 만들기 위한, 교환가치가 높은 지식을 소유한 자원으로 만들기 위한 학습의 요구가 높아졌다. 이때부터 인간의 지적 자본들의 개인화 현상도 두드려졌다. 결국 인간의 자본가치가 개인의 지식의 소유 여부에 따라 경정되며, 인간자본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사회적 요구는 ‘학습 사회’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게 되었다. 학습사회의 핵심이 학습을 누가 어떻게 수행하는가에 모아지자, 이런 관심의 중핵인 학습사회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성 중의 하나가 ‘학습사회’ 혹은 ‘지식사회’이다. 포스트모던과 배움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포스트(Post)라는 용어와 모던(Modern)이라는 용어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 이미 복합 명사로서 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의미의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지나갔다는, 혹은 나중이라는 뜻을 지닌 포스트라는 용어와 현대라는 두 용어가 합성된 용어이다. 문자적인 의미로 포스트모던의 뜻은 현대 다음의 뜻, 혹은 ‘맨 나중 현대’의 뜻, ‘이후 현대’의 뜻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포스트모던은 현대를 벗어나야만 그 모습이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는 의미로서의 초현대, 혹은 탈현대의 이미를 담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 구조주의나 포스트 인더스트리얼리즘의 경우처럼, 시간적인 면에서는 동시성보다는 후시성을 지닌다. 시간상으로 한정해서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다음에 다가오는 현상일 수밖에 없다.
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던의 이 시대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인 사상일 수도 있다. 전통을 선택적으로 고르고, 절충적으로 결합시켜야하기에 과거와 현재의 당면 과제에 적합하게 보이는 여러 측면을 포섭해야 한다. 이런 선택과 결합이 쓰임새 있게 성공할 때, 우리는 종합된 전통의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모더니즘의 전통을 계속 유지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해야 포스트모던의 의미도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실패할 때, 우리의 절충적인 혼합은 유치한 혼성 작품이 되거나 현란한 싸구려 키치 같은 것이 된다. 결과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기에 명령으로는 그것의 완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암기하는 교육으로는 그것에 근접하기 어렵다. 그래서 창조하고 선택하는 학습과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인간들의 학습망 혹은 배움의 연결망에 의해 더 더욱 공고해 진다. 자기 성찰적인 통찰력의 존재인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와 배움의 연결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게 되고 자기의 위치를 가름하게 된다. 그러한 배움의 관계를 통해 인간은 무엇인가가 자기에게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새롭게 발생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새로운 ‘관계맺음’의 연장을 위해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등 그 무엇인가를 상당한 방식으로 조절함으로써 더욱더 새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완성해 나가게 된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배운 인간, 배움이 있는 인간, 학습하는 인간, 학습 의지의 인간, 혹은 호모 에루디티오라 부른다. 인간과 인간 간의 사회적 관계를 제약하거나 구속함으로써 인간들이 갖는 사회관계를 제약하거나 구속함으로써 인간들이 갖는 사회관계를 조절하기도 한다.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는 일차적으로 개인을 다른 개인과 연결시키는 연결망이다. 이것은 개인에게 가족을 만들어 내고, 가족과 가족은 이웃을, 그리고 사회를 꾸려가게 만든다.
관계의 학습은 그 속성상 일회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의 관계에 대한 경험을 통해 몇 가지 과정을 거침으로써 발전된 대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먼저 가장 하위적인 충동(衝動)의 단계에서는 일반 동물의 본능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자기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표출시킴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충동의 단계는 유아기의 속성 그대로 모든 관계를 자기의 관점에서 자기를 위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속성이 있다. 그 후부터 주위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독점(獨占)의 단계를 거치면서 의존(依存)의 단계로 이전된다. 의존의 발달 단계에서 보이는 관계학습의 특성은 사람들 간의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는 하나 아직까지 관계의 폭은 개인의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존의 단계에서 발전된 것이 분리(分離)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개인과 사회적인 제도 간의 관계를 인지하고, 자기 자신을 보다 냉정하게, 좀 더 사회적인 존재로 정리해 나간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가장 성숙한 형태의 ‘관계학습’이 움트기 시작한다. 비로소 학습이 대인(對人)의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 단계는 자신과 사회, 자신과 타인 간의 관계를 더 객관적인 눈으로 정리해 감으로써 개인의 사적인 관계나 이익을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보다 통합적인 관계의 능력을 보여주게 된다. 이런 대인의 관계를 완숙하게 할 때, 사람들은 그를 성숙한 사람, 철든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인간의 관계학습은 성인이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이나 사회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런 관계학습이 잘못되었거나 부족할 때, 그 사람은 성숙한 사람으로서의 삶의 질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인간 성숙의 발달 단게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인 대인의 단계는 포스트모던의 사회적인 특징인 분화와 세포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간의 철들기와 비슷하다. 사회학자들은 포스트모던 사회는 ‘셀룰라 사회’(Cellular society), 즉 세포 사회라고 부르고 있다. 세포 사회에서 개인의 삶의 질을 제대로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대인관계(Interindividual)능력이 제대로 발달된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의 뜻을 헤아리며, 상대방에게 봉사하는 자세가 발달된 사람들이 이런 세포 사회에서 좀 더 원활하게 살아갈 수 있다.
포스트모던 사회를 세포사회라고 불렀을 때, 그 세포사회라는 말은 20세기 전통적인 산업 사회에서 통용되던 분자 사회 혹은 파편화된 사회와는 그 속성이 기본적으로 다르다. 서로가 연관이 없이 자기의 이익만을 찾아가면서 아우성을 쳐대는 그런 게젤샤프트의 이익 추구 사회와는 속성이 다르다. 수만개의 세포로 서로 갈리어 있으면서도, 원칙에 따라 제대로 된 작동을 부여해주기만 하면 하나가 전체처럼, 전체가 하나처럼 전체를 위해 총체적으로 반응하는 사회가 바로 세포 사회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으면 모두가 편안히 자기의 속성대로 자기의 영역을 지키고 있는 이런 포스트모던의 사회 세포 집단이 바로 ‘세포사회’이다. 각 세포 하나하나가 모든 기능대로 서로서로 구별되면서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각기의 사회적 역할을 전문적으로 감당하면서 전체적으로 불협화음을 내지 않고 조화롭게 작동하는 새로운 세포 사회가 바로 지금의 포스트모던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새로운 지역 사회 질서와 새로운 인간의 관계가 요구된다. 세포사회에서 요구되는 새로운 사회 질서는 서로가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시에 물질적으로 방해하지 않고 서로의 삶이 요구하는 질을 높이기 위해 공조하는 사회의 속성이다. 이런 포스트모던 사회의 질서를 ‘포스트모던의 새로운 시민주의(Postmodern New Civicism)’라고도 부른다. 포스트모던의 일상생활은 이렇듯 새로운 공동체 질서로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