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학자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은 영원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식적 세계관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과학의 역사는 하나의 진리 체계가 점진적으로 발전해온 과정이 아니라 기존하는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하여 대체되는 혁명적 과정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과학에서는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만물이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였지만, 뉴턴 시대의 과학에서는 질량을 가진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결과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상대성이론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지구의 질량이 지구의 중력장을 휘게 만들어서 일어나는 가속운동이다. 시대와 사람이 바뀌면 과학도 바뀌며 상식도 변한다.
상식이란 사회의 구성원이 자명하다고 인정하고 공유하는 지식이다. 그것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사회나 공동체가 바뀌면 상식이 몰상식이 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상식을 편견의 집합으로 설명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차원이 바뀌면 상식이 몰상식이 되고, 몰상식이 상식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상식이 과거나 현재나 자기주장을 정당화하는 통로가 되어왔다고 비판하였다. 지금 우리는 상식의 혼돈과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현실이 유지되는 길이 상식이고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현실이 바뀌는 것이 상식이다. 현실이 두 사람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기에 갈등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역사학자 소피아 로젠펠트(Sophia Rosenfeld)는 ‘상식의 역사’에서 인간의 역사를 상식을 통한 대립과 갈등의 과정이라고 규정하였다. 숲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숲의 모습이 상식이고 숲 안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는 보이는 나무가 상식이다. 하지만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현실이 유지되는 것이 상식이고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현실이 바뀌는 것이 상식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자유가 상식이고 사회주의에서는 평등이 상식이다. 그런데 두 상식은 동시에 실현될 수 없다.
경제학자 발터 크래머(Walter Krämer)는 ‘벌거벗은 통계’에서 통계에 기초한 상식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예로 들어 10명의 농부 중의 1명이 소 40마리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는 0마리를 가지고 있을 때, 통계에서 나타나는 최빈값은 0마리이고, 중간값도 0마리인데 산술평균은 4마리가 된다. 이처럼 산술평균은 통계에서 흔히 이용되는 상식이지만 소가 한 마리도 없는 9명의 농부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사실이 은폐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상식과 사실은 전혀 다른 차원을 형성한다. 흡연은 건강을 해치고 사회복지 비용을 증가시킨다는 상식은 오류이며 오히려 수명 단축을 통하여 사회복지 비용을 감소시킨다. 대마초가 포도주보다 건강에 덜 위험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상식과 부딪친다.
우리가 상식을 절대화하면 집단적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상식이 권력과 만나면 법과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수행한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는 헌법을 배제하고 루이 16세를 처형할 때 “왕은 무죄일지도 모르나, 그를 무죄라고 하면 혁명이 유죄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상식이 제도와 권력 안으로 들어가면 도덕성을 약화한다고 강조한다. 집단이 커질수록 책임은 분산되며 구성원들은 책임을 회피한다. 개인에게는 상식이 양심의 지배를 받지만, 집단이기주의는 개인의 도덕성을 훼손한다. 집단은 상식을 도덕적으로 위장하여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
진리는 문자적 의미로 참된 이치와 참된 도리를 말하는 것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사실이나 원리이다. 신플라톤주의를 계승한 어거스틴(Augustin)은 “인간은 유한하고 변하지만, 진리는 영원불변하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진리를 알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우리의 상식은 진리의 척도가 아니다.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상식의 편견에서 벗어나 타인과 공감하는 관용의 덕을 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