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교육운동은 배움을 지역공동체에서 펼치자는 평생교육의 토대입니다. 교육은 학교에서 하면 되는데, 무엇때문에 지역에서까지 번거럽게 펼치냐는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질문은 배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너무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게 됩니다. 배움은 특정한 연령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배움은 모든 이를 위한 문명활동입니다. 이제부터 한국인에게 배움이 어떤 뜻이 있는지를 한두차례에 걸쳐 이야기 하겠습니다.
훈민정음과 석보상절
배움이라는 말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문자는 우리 한글입니다. 세계의 여러나라 언어 중에서도 한글은 배움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배움이 우리 문자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왕검이 세운 고조선 성립 이후부터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1392년, 이씨 조선왕조가 성립된 후, 4대 째 왕인 세종때부터 비로소 배움이라는 말이 하나의 문자로 정확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한글이라는 문자가 없어서 배움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세종은 한글, 그러니까 훈민정음을 발명했습니다. 훈민정음으로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다는 점과 한글을 널리 보급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오로지 한문만이 문자라고 우기는 유학자들에 한글의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세종은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 세조)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붓다(부처)의 일대기와 그의 설법, 그리고 불교가 조선에 도래한 역사적인 전래 과정 등의 내용을 담은 책을 펴내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를 거쳐 마침내 1447년(세종 29년) 편찬된 이 책을 석보상절(釋譜詳節)이라고 부릅니다. 석보상절은 세종이 자신의 부인이었던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죽자, 그녀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한 훈민정음 보급용 책이었던 것입니다.
석보상절에서는 배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표현과 뜻이 우리의 문자, 우리 글인 한글에 의해 세상에서 처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석보상절에 실린 내용들은 당시 피지배계층인 백성도 읽을 수 있는 문자인 한글, 당시 표현으로는 언문(彦文)형식인 훈민정음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언문이란 말은 당시 조선의 지배층인 유학자(儒學者)들이 한글을 중국문자인 한문(漢文)에 대비해 아주 낮추어 부른 표현입니다. 언문이란 일반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문자, 상민과 천민을 위한 문자라고 얕잡아 보는 표현입니다.
임금 세종이 일반 백성을 위해 창제한 훈민정음이 바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한글입니다. 우리 문자인 한글의 기원에 대해 북한의 언어학자들은 남한의 학자들과는 다른 논리를 내세웁니다. 북한의 학자들은 단군조선에 이미 ‘신지글자’라는 고유한 민족글자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훈민정음은 ‘신지글자’를 계승발전시켜 만든 문자라는 것이 저들의 주장입니다만, 저들의 주장이 얼마나 옳은지는 더 밝혀봐야 할 연구문제 일 뿐입니다. 어떻든간에, 훈민정음의 창제는 문명사적으로 우리 한민족에게는 문화적 혁명입니다. 피지배계층인 상민들도 훈민정음으로 자신의 일상을 적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쓸 수 있게 된 문화적집단무의식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글, 민족의 문자인 언문 훈민정음에는 ‘배움’이라는 단어가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석보상절에 적시된 배움이라는 문자적인 표현은 처음으로 ‘배호다’로 등장합니다. ‘배호다’라는 표현이 바로 언어학적으로 배움이라는 말의 원형이 됩니다. 배호다라는 말의 쓰임새에 대해 오해 하지 말아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배우다라는 문자가 배호다라는 표현으로 석보상절에 등장했기에, 배우다라는 말을 우리 한민족이 세종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썻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배우다가 한글 문자로 표현되기 이전부터, 우리민족의 삶에는 배움이라는 말이 있었고, 일상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일상생활속에서 배우다라는 말을 써왔지만, 배우다라는 말이 다만 하나의 문자로 확실하게 표현된 것이 바로 세종때 부터 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배움은 가르침의 원형
우리 한민족은 아프리카 대륙과 서아시아, 그리고 중국대륙 등등 거처지를 옮기며 마침내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니다. 그때부터 한민족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 우리 말을 써 왔습니다. 그런 동이족(東夷族)이 하나의 문화를 공유할 그 때부터, 배우다라는 말은 이미 그들에게는 일상어였습니다. 다만 말을 글로 표현해 낼 통일된 문자가 없었기에, 그들은 배우다를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일상 생활어로서 배우다라는 말은 한민족의 이동과 더불어 변하고 변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배우다라는 말에는 문화적으로 이런 뜻, 저런 뜻이 더 보태지거나 빼어지는 변화과정을 거쳐, 그 의미는 더욱 더 다양한 의미를 지닌 생활어로 진화되어 왔던 것입니다.
우리 말 그리고 한글이 이제는 남북한 간의 군사적분단으로 인해 경우, 경우마다 서로가 조금씩 이질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탈북자 학생과 서울 출신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교수님, 배움학의 공식을 ‘배워주세요’라고 묻는 탈북민 제자에게, 교수가 그것은 E=mC2 이지 라고 가르쳤다고 했을때, 그 가르친다는 말은 배운다는 말과 그 뜻의 맥락이 같습니다. 한반도의 남쪽지방, 즉 남한의 각급학교에서 활용하는 가르친다는 말은, 놀랍게도 북한의 학교에서는 ‘배운다’ 뜻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종이 모든 백성을 위해 창제한 훈민정음, 한글은 남북분단이 군사, 정치, 사회적으로 오래 이어지면서 그 표기, 어휘, 뜻, 발음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남북한 민족간에 상호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글 표기의 경우 남북 모두 형태를 적는 형태주의를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상대적으로 더 행태주의 원칙을 따라왔고, 남한은 더 현지 발음대로 적는 표음주의를 취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는 계집 녀(女)는 어디를 가나 ‘녀’가 됩니다만, 남한에서는 ‘남녀(男女)’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어디를 가나, ‘여(女)’로 표기됩니다.
함경도 지방에서는 남한 말로, 소도 마시지 않는 두만강 물을 왜 구경하려고 하느냐를 이렇게 표현하곤 합니다. ‘쉐두 아니 먹는 물으 어때 보자 하암둥?’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서로 다르게 말해도, 뜻은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서로 알아 들을 것은 모두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로에게 동질적인 집단무의식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韓)민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북한이 지니고 있는 언어사상사의 차이는 보기에는 복잡한 것 같아도, 실생활에서는 단순합니다. 북한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배우다, 익히다라는 말이나 남한에서 일상에서쓰는 말이나 가르치다가 동일한 뜻으로 쓰이고 있는 사실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일은 일상적으로 배우는 일이고, 배우는 일은 일상적으로 가르치는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집단 무의식적인 표현입니다.
한민족의 이동과 배움
우리 말의 기원 역시 유럽인들의 언어처럼 그 뿌리가 아프리카 대륙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현생 인류는 약 15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발생해서 지구 곳곳, 세계 각지로 번지고 퍼졌습니다. 인간들의 의사소통 수단인 말도 그렇게 다양한 가지치기를 거쳐가며 온 세계로 번졌습니다. 유라시아어의 기원이나 아시아인의 언어, 그리고 우리의 한국언어도 아프리카 언어로부터 분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동부 아시아인들과 그중의 한분파인 한국인의 조상은 약 7만년전 북부 아프리카에서 분화된 인류였습니다. 그들이 처음 일상적으로 썻던 말의 기원은 아프리카 중부에 위치했던 산악국가인 르완다입니다. 르완다어는 중동 아시아를 거쳐 티벳, 파미르고원, 바이칼호수, 몽고, 한반도로 퍼지고 번지고 바뀌어 오면서 오늘날의 우리 말, 한글로 굳어져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엔 동남 아시아와 중국 해안 지역을 거쳐 온 남방계 사람들이 벼농사와 함께 먼저 정착했습니다. 북방계인 알타이로부터의 이동은 휠씬 그 뒤의 일입니다. 제1 경로인 ‘알타이, 몽골, 북만주, 한반도’와 제2 경로인 ‘알타이, 중국 북부, 산둥, 요동 그리고 한반도라는 두 경로를 거쳐왔습니다. 민족대이동의 과정 중 북방과 남방계가 서로 섞인 비율은 대체로 7대 3의 비율입니다. 한반도로 이동한 한민족 구성에서 북방계가 주류를 이루는 이유입니다.
지금의 ‘우리’로 불리우는 한민족은 인종학적으로 단일민족이 아니라, 일종의 혼열민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한민족을 단일민족으로 부른 것은 인종학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들 때문이었습니다. 단일민족으로 부르며 그렇게 하나로 몰아가야 국민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기 용이하겠기에, 국민을 그렇게 교화시켜 온 것입니다.
그간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한민족도 서양민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듯이, 여러 종족들 간의 융합으로 진화된 것처럼, 단일민족이 아니라 ‘혼혈민족’이라는 점입니다. 현재 한국인들의 혈통 유전자 평균값을 살펴보면, 한국인의 혈통에는 대충 한국인(49.6%), 일본인(25.1%), 중국인(20.7%), 동남아시아인(2.6%), 몽골인(1.8%), 시베리아인(0.2%) 등의 유전자들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민족 간의 의사소통 수단인 한국말, 그러니까 집단무의식을 하나로 이루게 만드는 상징인 우리의 언어인 한국말, 문자적인 표현인 한글에도 문명적인 혼혈성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한국말도 그렇게 사람들에 의해 익혀지고 가르쳐졌기에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