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같이多가치

 

다같이多가치

기성항 벽화에 감성을 담다

면벽수행  – 안창회 KCEF 감사(캐치크리에이티브 솔루션 대표)

“안 선생, 나는 어디가다 어떤 벽화를 보면 저곳에 저렇게 그리려면 오히려 안 그린 편이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곳이 눈에 들어와.”

벽화를 그리면서부터 들었던 J교수의 음성이 귓가를 스친다. 그는 조경기획자로 전국을 다니면서 벽화를 만나면 관심을 가지고 사진을 찍어 보내오면서 자신의 생각을 담아 조언을 준다. 혹여 누군가 내가 그려놓은 벽화를 보고서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머물고 있는 곳에서 15분가량 떨어진 작은 항구마을을 오가며 세 계절이 바뀌는 동안 같은 자리에서 담장 벽과 시름하였다. 나는 벽화작업을 면벽수행(面壁修行)이라고 한다. 매일 담장 벽을 바라보며 무엇을 어떻게 그릴까하는 고민은 무념무상으로 이어진다. 비로소 붓을 들면 삶의 온갖 기억들이 스쳐가기도 하고 과거속의 누군가가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 작은 항구마을에 벽화를 시작할 무렵 바다수면이 눈부신 봄날 해안가 긴 방파제를 따라 경사면과 도로바닥에 넓은 사각 그물망을 펴놓고서 할머니들이 불편한 자세로 쭈그리고 앉아 바다에서 막 따온 싱싱한 미역줄기를 일정한 크기와 양에 맞춰 놓으면 봄볕에 꼬독꼬독 까맣게 말라가고 있었다.

날이 더워지면서 그 많던 미역의 자취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그려가던 벽화그림이 한 골목 한 골목 접수해나가는 동안 검고 칙칙했던 골목들은 산뜻하고 독특한 갤러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생전 보지 못했던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며 할머니들은 신기한 눈빛으로 “ 참말로 좋은 기술도 가졌소, 어찌 그리 꼭 사진 같소.” “ 쓰윽 허고 걍 손이 지나가니 금새 사람이 되네. 참 금손이요.”

처음 벽화의뢰를 받았을 때 단순히 실행하기로 했는데 막상 디자인을 받아보니 그렇게 한다는 것은 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형편없는 아이디어가 나온 것 자체가 놀라움이라고 표현하고 싶었다. 이 바닷가 작은 마을을 어떤 컨셉과 주제를 담을 것인가, 어떤 방법의 표현이 나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였다. 주민과 방문객들이 모두 좋아할 다양한 표현방법의 그림이 필요하였다. 걸어가면서 벽화를 보며 읽을거리를 만들어 주고픈 생각에서 바다에 관련된 시(詩)들을 백편이상 골라서 다양한 켈리그라피로 그림과 함께 한편씩 담장 벽들을 채워 나갔다. 벽화 앞에서 서투른 발음으로 한 자 한 자 읽으며 시를 음미하는 한 할머니는 “여그 오가면서 하나씩 읽는디 내용이 어쩌면 꼭 내 처녀때 맘같으요. 읽으면 가슴이 막 뛰요. 이렇게 담벼락에 좋은 글 해줘서 고맙소,”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이 벽화의 시들이 거친 해풍에 돌처럼 굳어진 감성이 되살아나 머잖아 이 마을에서 할배 할매 시인이 나올 거라고. 빈집담장을 그릴 때는 공연히 내 마음도 허전하다. 고향을 떠났거나 주인이 머물다작고한 빈집은 나를 숙연하게 한다. 아직도 채취가 군데군데 남아 있어서다. 녹슨 우편함에는 무정하게도 비집고 쌓인 고지서가 퇴색되어 글씨마저 희미하다. 집 주인이 좋아했을 그림과 시를 적어놓는다. 잡초만 무성한 마당에 주인 잃은 무화과나무의 무성한 잎 사이로 보이는 열매를 따먹는다. 방파제를 따라

해당화들이 분홍빛 꽃을 피우고 갈매기들이 해변에서 나른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무더운 여름이 가고 있었다.

“안 대표요, 쉽게 갑시다. 날도 뜨건데 고생하면서 작품 할라 말고 대충 끝내버립시다.” 아침마다 공사현장을 둘러보는 전 사장은 피곤한 눈빛으로 말했다.낮게 책정된 벽화 비용이 미안해서 하는 소리인지 공사상황이 잘 안 풀려 하는 소린지는 알 수 없었다. 항만뉴딜사업 일환으로 이곳 작은 어항을 관광지 활성화 목적사업으로 해안가 환경공사를 하는데 주민들의 불만과 수정이 많았다. 그런데 마을미화사업에 들어있는 벽화는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많은 화가들을 뿌리치고 나를 잘 선택한 것이라고 자랑하였다.

해안가 450미터 방파제 앞으로 긴 고구마모양 마을 안에는 미로같은 좁은 골목마다 작고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오래된 낮은 불럭 담들이 그저 경계일 뿐 대문도 없는 집들이 많아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눈을 감고도 훤히 보이는 담장들 – 하루에 수차례씩 골목을 오가며 그릴 소재 구상을 한다. 만나는 집주인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어떤 그림을 좋아 하세요 물으면 딱히 떠오르지 않은 듯 알아서 꽃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수줍게 주문한다. 그러면서 음료수나 먹거리를 챙겨준다. 어떤 경우에는 집안으로 불러 점심상까지 차려준다. 잊혀진 고향의 옛 인정을 보는 것 같다.

농촌보다 어촌에 젊은 사람이 더 있는 편이다. 아무래도 농사와 달리 배를 부리는 데는 날렵한 운동신경이 필요해서 아닌가 생각한다. 배를 가진 부친이 돌아가시자 도시에서 IT업에 종사하다가 돌아와 어부가 된 젊은이도 있다. 봄에 그를 만났을 때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문어를 잡는다고 했다. 그 집 벽에는 황혼에 돌아오는 만선의 기쁨을 그려줬었다. 가을에 만났을 때는 인건비도 나오지 않아 외국인 노동자도 내보내고 혼자서 배를 몰고 있었다. 작은 어항의 작은 배들 대다수는 부부가 함께 어업에 종사한다. 그렇게 억척으로 재산을 일구고 자식들을 키워내고 출가를 시키고 노년이 되어서는 일상생활이 되어 배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용돈벌이 이상이 되었는데 도무지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바다 속 해류가 바뀌었는지 고기 종류도 달라지고 돈 되는 고기가 잡히지 않아 기름 값도 나오지 않아 나가기도 겁난다고 한다.

그들을 만나며 시인들이 바다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시와 그림을 벽화로 그려놓았다.

어느 농촌이나 마찬가지로 이곳 할머니들의 일상도 아침을 먹고 노인정에 모여 지난날들을 이야기하며 점심을 해먹고 하루를 보내다 5시가 되면 떨어지는 황혼 해를 등에 지고 긴 그림자를 유모차에 의지한 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 옛날 출향한 자녀들이 하교 길에 재잘대며 다니던 골목을 할머니들이 아이들처럼 재잘재잘 대며 가는 소리도 잠시다. 다섯, 여섯 분이 함께 가다 한 골목 만나면 셋, 둘 그리고 동무야 내일 만나자며 헤어져 혼자 텅 빈 집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기에도 쓸쓸하다. 마주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가득이나 한집너머 두 집이 비어있는데 그렇게 집을 비워두고 나가시다 혹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냐고 물었더니 외지인 출입도 뜸하고 잃을 것도 없다고 한다. 오래된 집과 집주인만큼 집안의 모든 것이 나이 들어 보였다. 대문이 없는 집들도 많다. 막다른 골목 집 담 벽에는 벽화를 그리지 않는다. 자칫 사생활 침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집 벽화를 보고 자신의 집에도 그려달라고 집요하게 부탁하는 할머니들도 있다.

집들은 대체적으로 지붕이 낮고 마당이 좁으며 건평도 좁은 편이다. 바다에 나가기에 농사는 생각도 못하고 마당에 푸성귀라도 재배해봐야 가을 태풍이 오면 파도가 밀려와 바닷물이 마을 안쪽까지 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어떤 할머니는 새댁일 때 친정에 다녀왔더니 집이 파도에 쓸려나가고 없어졌다라고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싶다. 항구에는 어선을 보호하는 방파제와 마을을 지키는 방파제가 만들어진 뒤에는 태풍피해는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강풍이 부는 날에는 시퍼런 산더미만한 파도가 우뚝 서서 하얀 괴물이 되어 표효하며 마을을 삼킬 요량으로 해변 모래밭으로 밀려오는 모습은 전율자체였다. 파도는 빨간 등대가 있는 높은 방파제를 넘어 데트라 포트 더미 위에 산산이 부서져 물보라 알갱이들이 하얀 포말로 파도에 밀려가 모래해안까지 뒤덮는다. 항 안에 어선들은 서로의 충돌을 막기 위해 밧줄들로 동여 메어둔다. 그리고 다행히 벽화 작업하는 동안 뉴스에 나올만한 태풍이 없어서 마을피해는 없었다.

석양빛이 아름다운 가을이 가는 동안 벽화도 거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던 처음과 달리 이곳 사람들과 정이 들면서 헤어짐이 아쉬움으로 남아 그들의 정과 함께 마음속 깊이 남았다. 반년 넘은 시간 속에서 매일 들락거리던 항구의 사랑방 태룡호 선장의 내외는 잊을 수 없다. “아무나 주지 않아요, 줄만한 사람에게만 줍니다.”이따금 싱싱한 생선을 한 바구니씩 챙겨주던 깊은 정을 잊을 수 없다. 간간히 볼 때마다 간식을 챙겨주던 해 뜨는 민박집과 회덮밥을 맛있게 하는 승일 민박집. 식사 때가 되면 불러주던 어촌계장. 많은 분들이 있어서 혼자서 그 긴 벽화를 아름다운 면벽수행이라고 생각해서 지루함 없이 완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몇 년 후 이곳에서 늦깎이 시인이 나왔다는 소식을 기다려 본다. 아마도 J교수는 그러지 않을까 지난번 매화 이현세 만화마을 벽화를 보며 말 한 것처럼 “나는 안 선생이 그린 벽화가 최고라고 생각해.”

 

 

 

< PREV 어느 ‘새해 만남’이 보여준 삶과 학습의 방향
 
NEXT > 제2부 담장 너머, 더 큰 공동체 세상으로 : 세션 1

TOP